터커 모터스의 설립자이자 사장이었던 프레스턴 터커는 1903년 9월 21일, 미시간주 카팩 근처의 페퍼민트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셜 하비 터커라는 철도 엔지니어였고, 그의 어머니는 루실 캐롤라인 터커였습니다. 그는 미시간 주 링컨 파크 교외의 디트로이트 외곽에서 자랐는데, 터커가 3~4살 무렵 아버지가 맹장염으로 사망한 후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11세에 처음 운전을 배운 터커는 자동차에 미친 소년이었습니다. 16세에 중고차를 구매해 수리·개조하여 판매해 이익을 보는 등, 기계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장사 수완을 함께 발휘했습니다. 터커는 디트로이트의 기술고등학교에 다닐 정도로 자동차 관련 기술에 관심이 높았고 자동차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품은 채 학교를 중퇴하여 캐딜락 공장에 입사합니다. 캐딜락 공장에서 터커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잡일을 보는 사환으로 일하게 되는데, 1922년 어린 터커는 어머니의 반대로 경찰 공무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경찰 공무원이 되었지만 터커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동차였습니다. 터커는 고성능에, 빠른 경찰차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터커는 고향과도 같은 자동차의 세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터커는 20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고, 주유소를 6개월 임대하여 아내와 함께 운영했습니다. 아내가 주유소에서 일을 하는 동안 터커는 포드의 조립 라인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후에는 자동차 영업 일에 뛰어들게 되었고, 자동차와 관련된 많은 일을 몸소 체험하며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토대를 쌓아갔습니다.
주유소 임대 기간이 끝난 후 포드의 조립 라인에서도 나온 터커는 다시 경찰서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귀 후 첫 겨울, 엔진 열로 실내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순찰차 대시보드에 토치를 사용해 구멍을 뚫는 괴짜 같은 사고를 치고 맙니다. 그로인해 터커는 경찰차를 운전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경찰복을 벗은 터커는 자동차 영업사원의 눈에 띄어 판매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터커는 자동차 영업에 매우 재능이 있었지만 회사가 집에서 차로 멀리 떨어져있던 탓에 일을 그만두고 다시 경찰서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터커를 고용했던 자동차 영업사원의 권유로 테네시 주로 이사를 가 영업 관리자로 일하다가 총괄 영업 관리자, 지역 영업 관리자 등의 직책을 맡게 됩니다.
1930년대 초, 터커는 매년 한 달 동안 인디애나폴리스 모터 스피드웨이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경주용 자동차와 그 설계자에 큰 관심을 가진 터커는 재능 있는 엔지니어였던 해리 밀러(Harry Miller)와 연이 닿게 됩니다. 터커는 경주용 자동차 개발 현장에 더 가까이 있기 위해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사했고 맥주 유통업체의 운송 관리자로 일하면서도 레이싱에 참여하며 구체적인 자동차 사업의 밑그림을 그려갔습니다.
하지만 이때 세계 2차 대전이 터지게 됩니다. 맹장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터커는 뉴스를 보고 전쟁을 사업을 위한 기회로 보게 됩니다. 터커는 군용 무기에 관심을 갖고 디자인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의 디자인은 해리 밀러의 엔진 기술력과 합쳐져 터커 장갑 전투 차량으로 이어집니다.
1940년, 터커는 항공기와 선박 엔진을 제조하기 위해 터커 항공 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1943년 그토록 믿고 함께했던 해리 밀러가 죽으면서 터커는 미시간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동차 회사인 터커 코퍼레이션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전쟁 후, 대중은 새로운 자동차 디자인을 원했지만 빅3 자동차 제조업체는 1941년 이후로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지 않았고, 출시 역시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소규모 자동차 제조업체에게는 큰 기회였습니다. 터커는 ‘미래의 자동차’를 개발하여 시장에 출시할 기회를 보았습니다. 터커는 혁신적인 기능과 현대적인 스타일을 갖춘, 안전 지향적 자동차를 디자인했습니다.
그러나 터커에게는 이 원대한 계획을 마무리하기 위한 자본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끌어와야 했던 터커는 주식을 발행했고, 자동차 판매 대리점을 모집해 영업권을 넘겼으며, 고객들에게 차량 구입 대금을 미리 받는 등의 조치를 통해 총 1,200만 달러의 거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은 첫 차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48년, 터커는 드디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꿈인 첫 차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터커48, 토페도로 불리기도 하는 이 자동차가 등장하며 대중은 터커에 열광했습니다. 언론은 터커의 자동차를 ‘20년이나 앞선 자동차’라고 극찬했습니다. 터커는 이 차를 2,450달러에 판매할 것이며 매년 천 대씩 생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동차 안전벨트가 그리 중요하게 취급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의무적으로 장착해야 하는 사양이 아니었기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터커는 자신의 자동차에 안전벨트를 달아 안전에 집중했습니다. 차체는 비틀림을 최소화한 구조로 설계되었고, 전면 유리창은 부딪혔을 때 운전자와 동승자를 보호하기 위해 밖으로 꺾이며 튀어나가게끔 설계되었습니다.
거기다 지금은 당연시 여기는 디스크 브레이크, 4바퀴에 따로 반응하는 독립식 서스펜션, 퓨얼 인젝션 및 반자동 변속기 등이 터커48에 적용되었고 운전자 보호를 위해 대쉬보드에는 완충제를 부착했으며 범퍼 안에는 엔진의 열을 식힐 수 있는 공기 흡입구 등이 달려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커브를 돌 때 알아서 방향을 트는 지능형 헤드램프를 터커가 처음으로 자동차에 적용했습니다. 헤드램프는 운전대와 연결되어 최대 10도 정도의 각도를 틀 수 있었습니다. 언론이 어째서 20년 앞선 자동차라고 호들갑을 떨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알루미늄 블록을 한 5.5리터 배기량의 166마력 엔진은 최고 196km/h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놀라운 수준의 가속력을 뽐냈습니다. 캐딜락이 시속 130km/h까지 도달하는 데 1분이나 걸렸는데, 터커의 자동차는 15초면 가능했습니다. 연비 또한 좋아 리터당 10km 정도의 거리를 갈 수 있었습니다. 이정도면 터커의 자동차는 시대를 앞선, 혁명적인 자동차가 맞는 것입니다.
수천 명을 초대해 선보인 첫 판매용 모델은 1948년 3월에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터커 자동차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겠노라 약속했던 은행들은 돌연 대출을 하지 못하겠다며 터커를 외면했고, 호의적이던 언론들도 비판적인 논조로 방향을 급선회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하는, 이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했다고 의심 받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 Big 3였습니다.
터커는 상황이 어렵게 되자 무리한 행보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만들어지지 않은 차로 계약을 시도했고 결국 공장을 닫아야 했으며 직원들을 해고했습니다. 엄청난 금액을 투자한 투자자들이 그를 사기죄로 고소했습니다.
1950년 터커는 15만 달러의 벌금과 징역 115년이라는 기소장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터커는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싸웠습니다.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의 법정 다툼은 1월 23일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모두가 터커를 등지고 돌아선 상황에서 자신의 무죄를 극적으로 입증해낸 것입니다. 그러나 터커는 재판에서 승소했지만 이제 공장이 없고, 빚에 파묻혔습니다. 생산 지연에 분노한 터커 딜러로부터 수많은 소송에 직면한 터커 자동차는 사실상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 초, 터커는 브라질의 투자자와 함께 새로운 스포츠카를 만들겠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브라질 여행 중 피로에 시달렸고, 미국에 돌아와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터커는 1956년 폐암 합병증으로 인한 폐렴으로 5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최종판결이 있던 날 터커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거대한 조직이 개인의 아이디어와 자유를 짓누르는 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말살시키는 행위이며, 내가 태어난 조국이 나에게 준 고통과 슬픔이다. 언제 어떻게 미국의 자동차가 위협을 받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한때 적국이었던 나라에서 자동차나 라디오를 사들여야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조국의 건전한 양심을 믿으며 아메리카의 꿈 또한 영원하리라 믿는다.
300명의 충성스러운 직원들에 의해 총 51대가 생산된 터커 48은 대부분 경매 처분 되었지만 그 중 한 대는 터커 본인에게, 나머지 한 대는 터커의 어머니에게 주어졌습니다. 처분된 터커 48 중 한 대는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이 구입했으며 또 한 대는 역설적이게도 포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터커 48의 또다른 오너이자 터커의 팬이었던 영화 ‘대부’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그의 삶을 다룬 영화, ‘터커(Tucker: The Man And His Dream)’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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