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사키치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 일본 토요타는 가난한 소년 토요다의 효심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867년, 현 일본 시즈오카현 코사이시 야마구치정. 시골 마을의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토요다 사키치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목수였고 집안의 장남으로서 가업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에 사키치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키치는 속으로 다른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사키치의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에 소학교만 간신히 졸업할 정도였고, 정규 학교 교육이나 훈련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산업 혁명으로 인한 근대화의 영향으로 시골 소년 사키치는 발명가가 되겠다는 큰 꿈을 꾸게 됩니다.
사키치가 눈을 뜬 분야는 베틀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베틀을 돌리며 고생하던 것을 보고 자란 사키치는 반드시 보다 쓰기 편한 직기를 만들어 고품질의 직물로 생활을 윤택하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당시의 직물은 직접 사람의 손으로 짠 거친 베였습니다.
가업을 잇기를 원한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키치는 밤낮으로 직접 설계도를 제작했습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1894년, 두 손을 사용했던 여태까지의 베틀과는 달리 한 손으로 작동할 수 있는 첫 발명품 ‘토요다식 목제인력직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기존 베틀에 비해 50% 빠르게 직물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890년 도쿄에 가 직기 특허를 내는 것을 시작으로, 사키치는 기존 제품의 개선에 개선에 개선을 거듭했습니다. 불편한 점이 나오면 끊임없이 연구하여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냈습니다. 1894년부터 1914년까지, 그가 개발한 대표적인 직기는 총 6개에 달하며 직조기 관련 특허는 사치키의 일생에 수십 개에 달합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개선이 오늘 날 토요타자동차의 경영 정신인 TOYOTA WAY를 이루는 양대 축중의 하나인 ‘끊임없는 개선(Continuou Kaizen)’의 모태가 되었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개선을 통해 ‘사람을 편하게 해주겠다(Respect to People)’로 이어져 토요타 경영 철학을 완성하게 됩니다.
1924년, 사키치는 그의 일생일대의 대작인 ‘G형 자동직기’의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G형 자동직기는 당시 전세계를 통틀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자동직기로 평가받습니다. G형 자동직기는 직기의 실이 끊기면 작업자의 안전을 위해 직기가 멈추는 기능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실제 향후 토요타자동차 생산 라인의 ‘라인스톱(불량이 발생하면 누구든지 라인을 스톱할 수 있는 장치)’의 기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G형 자동직기의 성공으로 사키치는 1926년 토요타자동직기제작소를 설립합니다. 일생의 대작을 완성했지만 1930년 타계하게 됩니다. 평생을 끊임없는 발명의 삶을 살았던 사키치는 타계하기 몇 년 전, 미국과 유럽 방문을 통해 앞으로 자동차가 새로운 산업의 축으로 부상할 것임을 예상했습니다.
GM, 포드 등 미국 업체들이 세계 자동차 산업을 좌지우지할 당시, 사키치는 반드시 자신들의 손으로 국산 승용차를 만들어보겠다는 새로운 신념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사키치는 너무 늙고 쇄약했습니다. 사키치는 그가 일구어놓은 모든 것인 G형 자동직기의 자동직기 특허권을 영국 회사인 플랫 브라더스(Platt Brothers)에 매각하여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만엔을 손에 넣게 됩니다.
토요다 키이치로
토요다 키이치로는 1894년 6월 11일, 현 일본 시즈오카현 코사이시 야마구치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사키치가 역직기 발명을 위해 토요하시와 나고야를 오갔기에 3살이 되기 전까지는 조부모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후에는 회사 내 주택에 거주하며 공장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는 환경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그 결과 본인도 기계에 익숙해졌습니다.
1917년 동경대학교에 입학해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1920년 졸업하여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으러 왔으나 사키치가 상하이 방직 공장 건설 감독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리자부로 상무이사가 회사를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키이치로는 다시 동경대학교로 돌아가 법학을 배우다가 1921년에야 가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사키치는 당시 동경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아버지의 회사에서 새로운 직기 개발에 열중이던키이치로에게 “이 돈은 모두 네가 가질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이 돈을 반드시 자동차 연구에 사용하라. 반드시 우리의 손으로 국산 승용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유훈을 남겼습니다. 키이치로는 막막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GM이나 포드 같은 거대 메이커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시도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키이치로는 미국 출장길에 올랐습니다. 조립 라인과 부품 라인을 둘러보았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온 키이치로는 토요다자동직기제작소에 10여명의 직원으로 ‘자동차사업부’를 만들고 끊임없이 엔진을 분해하며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엔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키이치로는 다시 한 번 미국 출장 당시로 기억을 되돌려보았고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 매우 정확한 규격의 부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고품질의 엔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재와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둘째, 조립 라인과 같은 대량 생산을 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 여기에는 직기를 생산하던 컨베이어 시스템을 응용했습니다.
키이치로는 아버지 사키치와 마찬가지로 불굴의 의지와 끊임없는 개선 정신이 있었습니다. 키이치로는 10여명의 직원으로 1934년 마침내 토요다 프로토타입 엔진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1935년 5월, 그의 첫 프로토타입 승용차인 모델A1이 탄생하게 되고, 1936년 마침내 국산 승용차 판매를 시작합니다.
토요다는 본격적으로 차를 판매하면서 브랜드의 이름을 보다 쓰기 쉽고 보다 모던한 ‘토요타’로 바꾸었고, A1의 개량형인 AA부터 토요타 브랜드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1937년 키이치로는 마침내 보다 효율적으로 고객의 니즈에 맞는 승용차의 대량 생산을 위해 토요다자동직기에서 분사하여 아이치현 코모로에 대규모 생산라인을 건설하며 토요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공장 건설 이후 키이치로는 생산 시스템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가가 낮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코모로(오늘의 토요타시) 라인에 증설되는 라인에는 전혀 낭비가 없었습니다. 키이치로는 부품을 어떻게 이동시키는 것인지, 한 작업에 얼마나 많은 인원의 사람이 필요한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라인에 반영했습니다.
이어 1937년 키이치로는 마침내 보다 효율적으로 고객의 니즈에 맞는 승용차의 대량생산을 위해 토요다자동직기에서 분사하여 아이치현 코모로에 대규모 생산라인을 건설하고 토요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 결과 시장 수요에 맞게 생산 규모는 계속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토요타 생산 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저스트 인 타임의 시초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을 가로지르는 일본 역사 속에서 토요타자동차 또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패전 뒤 심각한 디플레이션으로 회사가 어려워지자 노조와 “인원 감축은 절대 않겠다”는 각서도 썼습니다. 키이치로는 “사람을 해고하지 않는 것이 경영자의 도리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습니다. 즉 토요타자동차는 경영자 만의 소유가 아닌, 임직원 모두의 소유라는 경영 철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947년, 토요타는 첫 소형차 모델인 SA를 선보였으나 회사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949년에는 도산 지경에 내몰렸습니다. 간식히 얻은 은행의 협조 융자 조건에는 대대적인 인원 감축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49년 일본 전체가 닷지 라인 불황에 빠졌을 무렵 토요타자동차는 경영 위기를 맡게 됩니다. 토요타자동차는 당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은행, 거래업체 등에 채무상환유예, 대금지불유예를 요청했지만 스미토모은행은 채무상환유예를, 카와사키제철은 대금지불유예를 거절했습니다.
이 충격으로 1952년 3월 21일, 업무를 하기 위해 사무실에 남아있던 키이치로가 뇌출혈로 쓰러지게 됩니다. 발견이 늦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6일 만에 숨졌습니다. 토요타는 그 이후 스미토모은행과 카와사키제철을 철저하게 배제했습니다. 스미토모은행에서는 절대로 대출을 받지 않았고, 예금 또한 맡기지 않았습니다.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1965년 스미토모은행이 자신의 거래업체인 프린스자동차가 경영위기를 겪자 토요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토요타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철강을 살 때도 카와사키제철의 것은 절대로 사지 않았다고 합니다.
토요다 쇼이치로
토요다 쇼이치로는 토요다 키이치로의 장남으로, 1925년 2월 27일에 나고야에서 태어났습니다. 쇼이치로는 도쿄제일중학교(현 히비야 고등학교)와 제1고등학교(도쿄대학교 교양학부의 전신)를 다녔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징병 검사로 갑종 합격(1급) 되었지만, 이과였기 때문에 징병이 연기되며 1944년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에는 나고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훗카이도의 어묵 가공 공장과 주택 건설 회사에서 일했고, 1952년 아버지 키이치로가 사망하자 토요타 자동차공업에 입사해 20대 이사로 회사 경영에 참여했습니다. 쇼이치로는 원래 회사에 입사할 생각이 없었지만, 삼촌의 권유로 입사하게 된 것입니다.
쇼이치로는 1955년 연료 분사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 후 도호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57년, 쇼이치로는 직접 차를 몰고 미국으로 도요펫 크라운을 수출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고속도로에서 주행을 할 만큼 강력한 엔진이 없어 크라운은 미국 운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고, 회사는 상당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경험은 쇼이치로에게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는 나중에 “전 세계 어디에서나 좋은 성능을 낼 수 있는 고품질 승용차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토요타자동차가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된 계기는 한국전쟁이었습니다. UN군 사령부는 6·25 전쟁 당시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에서 트럭을 조달하기로 결정했고, 토요타자동차가 미군에 트럭을 납품하면서 회사가 큰 폭으로 성장했습니다. 트럭 납품으로 생긴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코로나와 퍼블리카 등을 출시해 토요타는 5·6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자동차 생산 업체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토요타가 미국의 Big3 업체 중 하나인 GM을 위협할 만한 세계적인 자동차로 탄생하리라는 것을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쇼이치로는 1961년에 전무이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토요타가 종합적품질관리(TQC, Total Quality Control)를 도입한 해와 같은 해여씁니다. 부총괄관리자로서 쇼이치로는 토요타자동차 내에서 TQC의 표준 기수가 되었으며 QC 홍보 총책임자를 역임한 후 사장이 된 토요다 에이지를 지원했습니다. 1965년 토요타자동차는 TQC의 성공적인 구현에 대한 데밍상(Deming Prize)에 지원하여 수상했습니다. 1967년 쇼이치로는 상무이사로 승진했고 1972년에는 전무부사장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1966년에는 토요타 코롤라가 출시 되었습니다. 1968년에는 미국 시장에도 진출을 했고, 1974년 코롤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1970년대에는 석유 파동이 있었습니다. 자동차 가솔린 값이 폭등하면서 미국 시장에서 소형차가 인기를 끌게 되자, 때마침 소형차를 대량 생산하고 있던 토요타의 자동차가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습니다. 그 당시 미국에서 생산되던 자동차들은 많은 가솔린을 소비하는 대형차가 주종이었기에 소형차는 찾기 어려웠던 반면, 토요타는 코롤라를 위시해 마일리지가 좋은 소형차들을 값싸게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1981년, 판매를 전담하던 토요타 자동차판매와 생산을 맡는 토요타 자동차공업이 합병하며 생긴 토요타자동차의 초대 사장 자리에 올라 해외 진출을 이끌었습니다. 토요타 자동차판매와 토요타 자동차공업이 합병된 후, 쇼이치로는 두 조직의 독특한 기업 문화를 융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3C, 창의성과 도전과 용기를 강조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조직의 경영 철학은 기름과 물에 비유되었습니다. 오래된 토요타 자동차공업은 효율성을 우선시했지만, 토요타 자동차판매는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를 가졌습니다. 1984년 쇼이치로는 토요타 자동차공업의 깊이 자리 잡은 관료주의로 인해 젊은 직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회사의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 회사의 ‘경직성’을 극복하도록 밀어붙였습니다.
쇼이치로의 리더십 하에 토요타는 북미를 시작으로 지역 시장에서 차량을 생산하여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1983년에 쇼이치로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GM 공장을 인수하기 위한 합작 투자를 구성하기 위해 GM과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NUMMI라고 불리는 New United Motor Manufacturing, Inc.는 1954년 토요타 코롤라와 쉐보레 노바의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2년 후, 토요타는 켄터키에 최초의 완전 차체 자동차 생산 공장을 열었고, 1988년 토요타 캠리의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공장이 문을 열었을 때, 쇼이치로는 회사가 “켄터키와 미국의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후 회사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케임브리지와 영국 버나스턴에 공장을 열었습니다. 쇼이치로가 1992년 회장이 되었을 때, 토요타는 22개국에 제조 공장을 두고 있었습니다.
캠리를 미국 시장에 발표하던 당시, 토요타는 4도어 패밀리 세단 시장에도 뛰어들었습니다. 1988년부터 많은 차종의 생산 공장을 일본에서 미국 현지 생산으로 바꾸면서 일본차에 부과된 연간판매 쿼터 제한을 슬기롭게 극복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값싼 차라는 이미지가 미국인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는 토요타 대신 고급 브랜드 렉서스를 발표하며 고급차 시장에서도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렉서스로 인해 1990년대 초반, 독일의 벤츠사가 판매 부진으로 회사 존립의 기로에 서기도 했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쇼이치로는 1992년 토요타 회장에 취임한 후 재계 활동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기업인 단체, 일본경제단체연합회 8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이후 1999년에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직을 역임했습니다.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사촌인 토요다 에이지에 이어 세계자동차공학회로부터 훈장을 받는 등 수상 경력 또한 화려합니다.
일본 버블경제기 이후 쇼이치로는 미국과의 긴장된 무역 관계를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토요타 자동차의 신임 회장이자 동생이 질병으로 인해 주미대사와의 논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토요타 회장으로 나서 미국과 일본의 무역 적자를 완화하기 위해 더 많은 미국 부품들을 자발적으로 구매하는 것에 대한 협상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일본경제단체연합회를 이끌고 법인 세율을 인하하는 등 경제 규제를 완화하기도 했습니다.
토요타 쇼이치로는 199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토요타의 명예회장을 맡았습니다. 토요타 쇼이치로는 2023년 2월 14일, 갑작스러운 심부전으로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토요타 아키오
토요타 아키오는 토요타 쇼이치로의 장남으로, 1956년 5월 3일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나고야에서 나고 자랐지만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상경하게 됩니다. 이후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뱁슨 칼리지에서 MBA 과정을 수려합니다. 졸업 후에는 미국의 투자은행인 AG 벡카에서 잠시 근무했고, 1984년 토요타에 입사해 생산관리, 영업직 등 바닥부터 다져나갔으며 그 중 판매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특히 자동차 관련 정보제공 사이트 GAZOO를 회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공시킨 일화가 유명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임원직까지 올라가게 되고, 2005년에 부사장에 취임했습니다. 2008년 토요타가 세계 판매 1위 자동차 기업이 된 후 2009년 토요타 사장직에 취임하게 됩니다.
2010년, 토요타는 토요타 리콜 사태를 맞게 됩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악재까지 겹쳐 GM에게 1위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지만 회사 내외의 위기를 잘 대처하며 2012년 1분기에 다시 1위를 탈환하게 됩니다. 또한 방만한 계열사를 정리하고 마이크로소프트, BMW, 소프트뱅크 그룹 등과 제휴를 맺으며 토요타 특유의 보수적인 경영 방식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내연기관 엔진에 대한 애착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일본 자동차 업계에서는 ‘전기자동차 반대 세력 대장’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2021년 말, 토요타 전기차 컨퍼런스에서 과거에 비해 경영 방식이 상당히 유연해진 토요타가 유달리 순수 전기차 시장에는 진출이 늦은 이유가 토요다 아키오의 이러한 성향 때문이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2023년 1월 26일, 온라인 기자회견을 통해 사장직 퇴임 및 회장직 취임을 선언했습니다. 토요다 아키오의 토요다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이상으로, 153오토테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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