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를 사랑한 어린 소년
헨리 포드(Henry Ford)는 1863년 7월 30일, 미국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농촌 디어번에서 윌리엄 포드와 메리 리토갓 오언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디어번은 당시 개발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시골 마을이었고, 주민들은 모두 농업에 종사했습니다. 헨리의 아버지 윌리엄 포드는 아일랜드 이민자였는데 스스로가 농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농사 지을 땅이 없어 미국으로 온 처지였으니 아무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미국이야말로 그에게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장남인 헨리는 도무지 농사일에는 흥미가 없었습니다. 기계를 보면 눈을 반짝이며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며 기계에 대한 흥미를 키워나갔습니다. 어린 헨리가 보기만 하면 순식간에 분해해버렸기 때문에 포드가 일대에는 자명종 시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이가 조금 들고부터는 분해했다가 다시 완벽하게 조립해냈으니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기계나 공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헨리에게는 인간보다 기계가 더 친근했고, 그가 존중할 수 있는 인간은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 같은 발명가나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같은 과학자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12살이 되던 해에 지병을 앓고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려터진 마차를 타고 오느라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농부인 아버지와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기계 따위는 제발 집어치우고 농사일을 착실하게 배우라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나날이 심해져, 이에 버터지 못한 헨리는 15세 어린 나이에 디트로이트로 가출을 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의 포드
이후 헨리는 작은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일주일 만에 쫓겨나게 됩니다. 일을 못 해서가 아니라 공장의 업무 과정을 단순하게 고침으로써 작업 능률을 향상시키고 필요 인력을 줄일 수 있느 기획안을 대뜸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헨리는 노동자들이 노동력 수요를 줄이는 구조 조정을 싫어하는 것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생각에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그러면 노동자도 더 많은 임금을 받을 테니 모두가 좋아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고, 그들의 반대를 헨리는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노동조합에 대한 그의 불신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헨리는 1890년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에디슨 일루미네이팅 사에서 기술 책임자로 근무하며 자동차 제작에 몰두했고, 그 능력을 더욱 키워나갔습니다. 그는 존경하는 토마스 에디슨의 인정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포드가 에디슨 앞에서 가솔린 자동차 개발 계획을 발표하자 에디슨은 테이블을 쾅 치면서 “자네 듣던대로 현명하군. 생각대로 가솔린 자동차를 만들어 보게.”라고 격려했습니다. 포드는 평생 아내 이외에 자신의 꿈을 이해해 준 두 번째 사람이었던 에디슨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기 연구에 몰두하던 에디슨은 가솔린 자동차 개발에 관해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포드는 1899년 경주용 자동차를 제작하기 위해 에디슨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1903년 그는 석탄 딜러였던 알렉산더 맬컴슨(Alexander Malcomson)과 함께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 ‘포드’의 시작입니다. 이곳에서 헨리는 세계 최초의 양산형 대중차인 모델T를 생산했습니다.
포드의 첫 차 ‘모델A’와 대한제국 고종 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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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7월, 포드의 첫 차인 ‘모델A’가 출시되었습니다. 850달러의 소형차로 출시된 지 1년 만에 2천대 가량의 판매량을 기록했습니다. 포드 모델A는 한국과도 중요한 인연이 있습니다. 바로 포드 모델A가 한국 최초의 수입 자동차입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탁지부에서 사두마차 대신 자동차를 사용할 것을 주청하자, 미국 공사 앨런에게 차량의 구입을 의뢰했습니다. 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포드 모델A 자동차가 칭경식(稱慶式) 의전용 어차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포드 모델A 리무진은 칭경식이 끝난 몇 달 뒤에 인천항에 들어오게 되었고, 황제가 타기엔 그 크기가 작아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제로 운행되지는 못했습니다. 아쉽게도 한국 최초의 수입차인 포드 모델A의 실물은 1904년 발생한 러일전쟁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최초의 수입차가 포드 모델A가 아니라 미국 캐딜락(Cadillac) 자동차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실물이 사라진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캐딜락 회사도 헨리 포드가 설립한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1902년 헨리 릴런드(Henry Leland)가 인수하여 세운 회사이기 때문에 결국 한국 자동차 역사에서 헨리 포드와 맺은 인연은 뗄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의 대중화를 선도한 포드 모델T
포드 자동차 회사는 투자자 열두 명으로부터 28,000달러를 받아 마차 공장을 개조한 곳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초기 수 년간 디트로이트 시의 공장에서 하루에 몇 대의 자동차 만을 생산하는 소규모 회사였습니다. 1908년 9월 27일, 포드는 포드 모델T를 발표했습니다. 초기 모델들은 포드 피켓 공장(Piquette Manufacturing Plant)에서 제조되었지만 곧이어 포드 하이랜드 파크 공장(Highland Park Plant)로 옮겼고 이곳에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인 하루 천 대 생산이라는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습니다.
포드가 모델T를 발표하던 당시 자동차란 사치품이자, 소수의 부유층 만이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헨리 포드는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이든 정비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현대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가진 차를 만들겠습니다. 그 가격은 어지간한 봉급 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라며 모델T 자동차를 광고했습니다. 모델T 자동차 가격은 당시 냉장고 가격보다 더 저렴했다고 합니다. 포드사에서는 앞으로 오직 모델T 하나만을 생산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포드의 이런 대담한 결정을 듣고 가장 소리 높여 환호한 사람들은 미국의 일반 대중이 아니라, 경쟁업체 관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포드가 망하려고 작정했군!” 그들이 보기에 포드는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바라보고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우선 자동차란 사치품이며, 소수의 부유층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입니다. 부유층은 단조로움을 제일 싫어하며 개인적 취향에 따라 이것저것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옵션이 전혀 없이 색깔부터 성능까지 오직 한 모델로 승부한다니. 그리고 싼 가격에 성능 좋은 자동차를 내놓는다는 목표는 불가능한 이상에 가까웠고 실현할 수 없는 꿈이라 치부했으며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간, 한때 포드의 동업자로 함께 포드 자동차를 창립했던 알렉스 맬컴슨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그는 이제 옛 친구이자 동료는 끝장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알렉스 맬컴슨은 이미 3년 전에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고집하는 포드와 충돌한 끝에 자신의 주식을 팔아치우고 포드 사를 떠났습니다.
맬컴슨은 1903년, 포드와 의기투합해 처음 회사를 세우던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게 엉성했지만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빨리 달리는 차가 사람들의 주먹을 받기 때문에 오직 속력에만 중점을 두고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경주대회에 내보내 비록 죽을 뻔 하기도 했지만 당당히 1등했습니다. 목공소 건물에 세를 들고, 제작 기계도 살 수 없어 하청을 주는 형편이었지만 의욕만은 어떤 회사 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 7월, 그 덥던 여름날, 마침대 포드의 첫 차인 ‘모델A’를 내놓았습니다. 850달러짜리 소형차였습니다. 첫 해에 2,000대 가까이 팔았으니 운이 좋았습니다. 맬컴슨은 헨리를 기술자로서는 최고지만 경영자로서는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옛 동료의 몰락에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뒤, 그 안타까움은 당혹감과 괴로움으로 변했습니다. 포드의 모델T 자동차는 자동차 사상 최초로 연간 판매량 10,000대를 돌파했습니다. 그 기세는 날로 더했습니다. 1911년에 30,000대, 1913년에는 100,000대를 기록했으며 더 나아가 유럽과 호주에서도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전 세계 자동차 100대 중 68대가 포드의 모델T로 채워졌습니다.
마이카 시대의 개막
“망할 작정을 했던” 포드의 대성공은 주 고객층을 부유층에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맞춘 그의 선택이 대중사회로 진입하던 시대의 흐름과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빛을 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포드는 입버릇처럼 “5%가 아니라 95%를 위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면 복잡해서는 안되며, 기술 지식이 없 는 일반인도 운전과 정비를 척척 할 수 있어야 하고(당시의 자동차는 아주 단순한 정비도 전문가에게 맡겨야 했다), 유지비도 적게 들고, 포장도로든 비포장도로든 어디든 달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싼 값으로 차를 내놓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비싼 차라면 95%의 대중이 지갑을 열 리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포드는 이 문제를 ‘생산 공정 단순화’와 ‘합리화’로 해결했습니다. 오직 모델T만을 생산하기로 함으로써 생산 공정은 표준화되었습니다. 여기에 테일러가 수립했던 ‘과학적 관리기법’을 도입, “노동자가 단 한 순간도 업무에 불필요한 동작을 하지 않게 하고”, “작업장의 단 한 뼘도 불필요한 공간이 없도록” 모든 것이 최고의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1911년부터는 컨베이어 벨트까지 도입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백화점 진열장 등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되던 컨베이어 벨트를 처음으로 공장에 설치한 포드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벨트의 부품에 노동자들이 일렬로 서서 똑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라인 생산 시스템을 창출해냈습니다. 이로써 작업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져, 이전에 노동자 한 사람당 연간 자동차 3대를 생산했다면 1908년에는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1914년에는 24초당 한 대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가격도 싸져서, 1908년에 900달러이던 모델T가 1914년 당시에는 400달러가 되었습니다. 생산 비용이 줄어든 만큼 종업원의 임금도 후해졌습니다. 포드 사의 노동자들은 일단 5달러를 받았는데, 동종업계에 비해 두 배에 이르는 고임금이었습니다. 헨리 포드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돈을 벌고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게다가 소수의 부유층들의 전유물이던 자동차는 모델T 자동차를 구매하는 대중들에 의해 점차 도로를 채워갔습니다. 게다가 당시 미국에서 고속도로의 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이때부터 자동차로 멀리 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일상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헨리 포드가 바라던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가 실현되었습니다.
마이카 시대의 개막은 포드 시스템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노동차도 차를 타고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이건, 마차건, 자동차건 ‘자가용 탈 것’은 언제나 소수 귀족-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오랜 역사를 마감하는 ‘혁명’이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미국인들의 생활은 자동차가 없으면 안 되며, 출근, 통학에서 쇼핑, 레저. 뭐든지 자동차 도로를 중심으로 생활의 틀이 짜여있습니다. 이러한 생활방식이야말로 포드가 “망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포드의 생산 방식과 경영 철학은 모델T처럼 세계로 퍼져나갔고, 컨베이어 벨트에 의한 라인 생산, 과학적 관리기법, 소수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소품종 대량생산은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 테마로 자리잡았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포디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포디즘의 그림자도 컸습니다. 이제는 세계 최대의 부자 대열에 낀 포드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고임금을 주고 있는 자신의 회사에서도 노동쟁의가 벌어지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파업을 벌이다가 경찰의 손에 질질 끌려가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노동자들의 말에 포드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기계에 비하면 훨씬 못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고용하고 비싼 임금을 주고 있는데, 포드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포드 시스템이란
포드 시스템의 핵심인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5세기 광산업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체인 버킷을 사용하여 부치가 큰 물체를 운반한 버킷 컨베이어는 중요한 기술 혁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한 기계를 발전시킨 것이 바로 컨베이어 벨트입니다. 1700년대 초에는 평평한 나무 판자 위에 물건을 올려 운반하거나 광산업에서 광물을 운반하는 용도로 컨베이어 벨트가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벨트에 사용된 가죽이나 무명을 고무로 교체하고, 기계적인 요소들이 적용되어 기능이 더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1913년부터 포드 공장에 컨베이어 벨트를 사용해 생산라인을 구축했습니다. 이를 적용한 첫 모델이 바로 포드의 모델T 차량으로, 원가절감에 성공하여 기록적인 매출성장률을 달성했습니다. 게다가 부품의 규격을 통일화하여 부품의 집중 샌산을 가능하게 하였고, 부품 생산에서도 대량생산 체제를 실현했습니다.
포드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컨베이어 벨트 뿐만 아니라 이동조립법도 있습니다. 이동조립법이란 일에 사람을 가져가는 대신 사람에게로 일을 가져가는 생산 시스템 기법입니다. 즉, 노동자 앞에 부품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통과하면 각 노동자는 제자리에서 일정한 속도로 작업에 임하는 생산 시스템을 뜻합니다. 한 번의 멈춤 없이 계속되는 생산 시스템이라는 의미에서 플로 작업 시스템(Flow Productiom System)과 컨베이어 시스템(Conveyor System)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헨리 포드가 확립합 포드 시스템은 대량생산을 통해 자동차 산업의 혁명을 실현시켰으며 효율적인 표준을 만들었습니다. 포드 시스템은 많은 공장에서 채택되어 적용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급진적인 발전을 야기했습니다. 오늘 날의 공장에서도 포드 시스템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현대 문명을 연 포드
한 소년이 헨리 포드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현대’란 말이에요.” 그러자 포드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얘야, 그 ‘현대’를 발명한 게 나란다.” 이처럼 포드는 오늘 날 중산층 기반의 대량 생산, 대량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문명을 연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세기까지의 근대 사회가 소수의 귀족들을 위한 문명이었다면 20세기 현대 사회는 신분의 차이가 없는 대중들의 사회입니다. 헨리 포드가 도입한 컨베이어 벨트에 기반한 대량 생산 시스템은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다른 여러 산업으로 퍼져나가면서, 현대 사회의 특징을 형성했습니다. 노동자가 창의서을 발휘하기보다는 기계에 예속된 부품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면서 노동 소외가 발생했는데, 이것 역시 포드 시스템의 결과물이었습니다.
포드는 미국의 중산층을 만든 사람입니다. 포드는 노동자에게 파격적으로 높은 급여를 지급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1914년 그는 하루 8시간 근무하고 ‘일당 5달러’를 지급하는 정책을 세웠는데, 당시 철강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을 근무하고 1달러를 받았습니다. 시사만평을 보면 포드 공장의 노동자들은 모피를 입고 기사가 모는 자가용을 타고 포드 공장에 일하러 가는 것으로 묘사될 정도였습니다. 주 5일제 40시간 근무 제도를 처음 실시한 사람도 포드였습니다. 당시 포드 공장에 취직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공장 정문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심지어 일부는 문을 넘어 공장으로 들어오려고 하여 경비를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아일랜드계 백인으로서 흑인에 대해서도 백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장애인을 배려하는 등 좋은 일터를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시각장애인이나 두 팔이 없는 사람까지 고용하여 동등한 급여를 지급했다고 합니다.
아들의 죽음과 포드의 위기
에드셀 포드(Edsel Ford)는 헨리 포드의 유일한 아들로서 뛰어난 기술자이자 경영자였습니다. 그는 1919년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에 포드사 사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경영철학은 자신의 아버지와 정반대 길을 걸었는데, 디자인을 강조하며 고급 자동차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모델T 단일 품종의 생산만을 고집하지 않고 경쟁사인 제너럴모터스(GM)처럼 차의 성능보다는 디자인을 강조하고, 다양한 모델을 선보일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이후 에드셀 포드가 주도하여 새로운 모델A를 출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1927년 링컨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고 1930년대에 포드사의 대표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가 많이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조합을 수립하겠다는 노동자들의 요구와 집단 파업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포드는 1941년이 되어서야 “이대로라면 회사는 망하고, 당신은 맞아 죽을 것이다. 고집을 계속 피운다면 당신과 갈라서겠다”는 아내 클라라의 최후통첩에 못 이겨 노조 설립을 승인했습니다. 대중들은 헨리 포드에 대해 나치의 협력자라는 비난을 퍼부었고, 포드사의 비인간적인 노동 시스템을 질타하는 지식인들도 나타났습니다.
1922년, 헨리 포드는 이제 창당한 지 얼마 안 되는 유럽의 조그마한 정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했습니다. 독일의 잔챙이 정당에서 그가 이익을 볼 전망은 없었고 여전히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그가 절실히 원하는 이익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막대한 기부를 한 것은 그 정당이 그의 평생 신념과 일치하는 노선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반 노동조합, 반 사회주의, 그리고 반 유대주의. 정당의 이름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 바로 히틀러의 나치당이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심한 반 유대주의자였으며 ‘국제 유대인’이라는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히틀러는 헨리 포드의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헨리 포드의 초상화를 자신의 사무실에 걸어두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8년 헨리 포드는 당의 초창기에 아낌없이 베푼 재정적 기여에 보답하는 의미로 나치당에서 대십자 훈장을 받은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화가 포드의 발목을 잡는 사슬이 되었습니다. 1929년 세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를 맞이하며 포드 회사 역시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1943년 5월 25일, 아들인 에드셀 포드가 위암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헨리 포드는 사망한 아들을 대신해서 부득이하게 81세의 나이로, 뇌졸중 증세가 있었지만 다시 회장직에 취임했습니다. 나이로나 건강으로 도저히 제대로 일을 할 처지가 아니었고,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를 잃은 마음의 고통도 수반되었기에 그가 경영을 지속할수록 회사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행정부는 전쟁 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포드사를 국유화 하고자 기회를 노렸습니다. 말년에 이러한 고난과 실망과 회한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헨리 포드는 1945년 은퇴하고 손자인 헨리 포드 2세(Henry Ford Ⅱ)가 대표로 취임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은퇴 2년 후인 1947년 4월 7일에 뇌출혈 발작을 일으켜 영영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포드는 자동차도 컨베이어 벨트도 과학적 관리기법도 처음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경영의 기적을,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냈습니다. 20세기 초, 소수에게만 허락되던 개인용 탈 것을 만인의 것으로 대중화시킨 그의 혁명은 20세기 말, 컴퓨터가 대중화되는 혁명에만 비교 가능한 규모와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말의 혁명은 포디즘의 혁명을 폐기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소품종 대량 생산 시대를 접고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가 가졌던 여러 가지 신념, 노동조합과 복지국가에 대한 불신과 오로지 효율성만을 따지는 경영철학, 그리고 나치즘이나 반 유대주의 성향 등도 오늘 날에는 대부분 날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는 포드가 만든 틀에 얹혀서 돌아갑니다. ‘기계’ 부분은 포드의 것이고, ‘디자인’은 포드 이후의 것인 셈입니다. 미국의 유머작가이며 배우였던 윌 로저스는 포드를 두고 1920년대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괴로움을 주었는지 알려면 백 년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헨리 포드 박물관
헨리 포드 박물관(Henry Ford Museum)은 그가 1929년 학생과 학자들을 위해 세운 역사 박물관으로 미국 자동차의 발상지인 미시건주 디어본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사실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 기념관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50주년을 맞이한 1929년 헨리 포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포드 공장 인근에 에디슨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32년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었으며, 1947년 헨리 포드가 세상을 떠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헨리 포드 박물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2004년부터 헨리 포드 아카데미와 벤슨 포드 연구센터, 그린필드 민속마을 체험장 등이 추가로 설립되면서 현재의 복합문화단지가 탄생했습니다. 박물관이 가장 많은 미국은 각 지역마다 비교적 큰 규모의 자동차 박물관을 운영하는데, 그 중에서 헨리 포드 박물관은 연간 160만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방문할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합니다. 인기의 비결은 헨리 포드와 관련된 물건뿐 아니라, 포드의 경쟁사인 GM, 크라이슬러의 차량은 물론 기차, 항공기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운송수단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미국 상륙작전으로 미국 자동차 산업에 위기를 가져온 일본의 토요타와 혼다 차량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유가상승으로 연비효율을 높이면서 차량의 경량화가 이루어지는 과정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이 있어 헨리 포드 박물관에서는 글로벌 자동차 회사 포드의 과거와 미국 산업의 격동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153오토테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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