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벤츠
카를 벤츠는 1844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서쪽으로 80km 떨어진 도시 카를스루(Karlsruhe)에서 철도 기관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두 살이 되던 해, 폐렴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살림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하숙업으로 가계를 꾸리며 카를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카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사진과 시계 등 기술 분야에 흥미와 소질을 보였습니다. 13세 때 처음 본 내연기관은 그의 인생을 바꿨고 그때부터 카를은 ‘움직이는 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고향에 소재한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대학을 마친 뒤, 같은 지역의 기계 산업 회사에서 2년간의 실무 교육을 이수했습니다. 이후 만하임 계량기 공장의 제도공이자 설계자로 일하며 엔지니어로서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러나 카를은 그의 경력을 순탄하게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1868년 직장을 잃고 교량 건축 전문회사에 입사했으나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위치한 제철 회사에 들어가지만 그마저도 짧게 근무하며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후 라인강을 따라 북쪽으로 70km 정도를 흘러가면 만나는 북쪽 도시, 만하임으로 이사해 동업자 아우구스트 리터(August Ritter)와 함께 1871년 강철 판금 회사를 차리게 됩니다.
카를 벤츠와 베르타 링거
베르타 벤츠는 1849년 독일 서남부 포르츠하임에서 유복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접점이 없던 카를 벤츠와 베르타 벤츠는 한 사교 모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남성들이 여성이 타고 있는 여러 마차에 오르내리며 결혼 상대를 찾는 행사였습니다. 그때 베르타가 탄 마차에 카를이 오르게 됩니다. 남루한 옷에 수줍은 많은 카를의 모습에 베르타는 사랑에 빠집니다.
베르타와 카를의 연애가 시작되자 베르타의 부모님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변변찮은 직업, 내성적인 성격까지 부모 입장에서 딸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베르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소년처럼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얘기하는 카를에게 반한 겁니다.
카를이 1871년에 아우구스트 리터와 힘을 합쳐 설립한 첫 회사는 설립 이후 그렇다 할 수익을 내지 못했고, 창업 시 받은 대출금을 해결하지 못해 차압까지 들어오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직접 영입한 기계 기술자인 아우구스트 리터와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믿을 수 없는 사업 파트너라는 것을 알게 된 카를은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이런 카를을, 그의 약혼녀인 베르타 링거는 곁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낙천적이고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한 베르타는 자신의 남편이 될 성실하고 전도유망한 남자가 사업 파트너로 인해, 또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자 자신의 결혼 지참금을 카를에게 주었습니다. 비록 거액은 아니었지만 카를은 그 돈으로 사업 파트너에게서 권리를 사들이고, 의사결정권을 확보하여 아우구스트 리터를 해고했습니다. 베르타의 지참금이 카를이 스스로 회사를 경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 셈입니다. 1872년, 카를 벤츠는 자신의 신생 회사가 다시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베르타 링거와 결혼을 했습니다. 금슬이 좋았던 그들은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둔 다자녀 가구의 부부가 되었습니다.
자동차의 기본 시스템 특허
베르타와 결혼식을 올린 후 카를은 공장용 대형 엔진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주철공장과 기계작업실은 회사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공구들이 압류되기까지 했습니다. 카를은 회사의 새로운 수입원을 찾기 위해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목표로 했던 ‘말이 끌지 않는 자동차’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끌지 않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엔진이 필요했습니다. 1877년 도이츠 가스 자동차 공장(Deutz Gasmotorenfabrik)이 4행정기관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기 때문에 카를은 가스 구동 방식의 2행정기관 엔진 개발에 집중적으로 매진했고, 2녀 간의 개발 끝에 1879년 엔진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2행정기관을 개발하면서 카를은 엔진 속도 조절과 같은 자동차 개발에 필요한 여러 주요 기술 특허를 획득했습니다. 배터리 시동, 점화플러그, 속도 조절 시스템, 기화기, 클러치와 기어 시스템, 수냉식 라디에이터의 특허를 획득하는 등 지금의 자동차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기본적인 시스템 대부분을 고안했습니다. 1882년 카를 벤츠와 베르타 벤츠는 새로운 재정 지원자와 파트너, 은행의 도움으로 회사를 공개유한책임회사로 변경하고 회사명도 만하임 가스 엔진 제작회사(Gasmotoren-Fabrik Manheim)로 개명했습니다. 당시 카를의 지분은 5%에 불과했는데, 그가 기술 부분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후원자이자 사업 파트너들은 안정적인 비즈니스인 고정형 가스 엔진 개발에만 매진할 것을 원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경영에 함께한 파트너들이 카를의 설계에 조금씩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1883년 카를은 회사를 떠나게 됩니다.
최초의 자동차
같은 해인 1883년 카를 벤츠는 사업가인 막스 로제(Max Rose)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슬링거(Friedrich Wilhelm Esslinger)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그해 10월 카를은 만하임에 벤츠 자동차 회사(Benz & Co)와 세계 최초의 자동차 공장 라이니쉐 가스 자동차 공장(Rheinische Gasmotoren-Fabrik)을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카를이 자동차 엔진 개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새 회사는 급격하게 성장했습니다. 둘뿐이었던 직원 수는 금세 25명이 되었고, 가스 엔진을 제조하기 위한 면허도 발급받았습니다.
재정적으로 안정이 되자 카를 벤츠는 4행정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고성능 자동차를 설계하기 시작하여, 1885년 2인승 마차에 0.75마력 1기통 4행정 엔진을 달고 차동 장치까지 탑재한 차를 완성했습니다. 이 차가 바로 첫 번째 삼륜 자동차입니다.
그리고 1886년 1월 29일 마침내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은 놀라운 발명품이 탄생했습니다. 의자와 핸들, 세 개의 바퀴를 단 최초의 자동차가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차는 954cc에 0.9마력을 발휘하지만 100kg의 초경량을 자랑하는 4행정 휘발유 엔진을 갖고 있었습니다. 독일 정부의 공식 특허 37435번을 얻었기 때문에 ‘벤츠 페이턴트 모터바겐 1호’ 즉 벤츠(Benz)가 특허(Patent)를 받은 모터(Motor) 달린 수레(Wagen)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페이턴트 모터바겐은 세계 최초로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독일에서 특허를 받았습니다.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세 종류의 삼륜차를 생산했는데, 첫 번째 모델은 1906년 독일 박물관에 기증했고, 두 번째 모델은 여러 번 수정 개조했으며, 목재 스포크 차륜을 장착한 3번 모델은 그의 아내 베르타 벤츠가 1888년 최초로 장거리 자동차 주행을 할 때 사용됩니다.
카를 벤츠는 자신이 만든 자동차로 특허를 땄고, 공인된 자동차 역사에서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주인공이 되었지만 페이턴트 모터바겐에 대한 이웃들의 평가는 냉혹했습니다. 환영은커녕 말이 이끄는 마차가 아닌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세 바퀴 물건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냄새나는 고물이라고 하거나 악마에 씌었다며 이웃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배척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자신이 오랜 시간을 투입하여 만들어낸 열정의 산물이 세상에서 냉정한 평가와 외면을 받는 것에 카를은 의기소침했습니다. 완벽주의와 소심한 성격 탓에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하고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고민만 하던 카를에게 용기를 준 것은 바로 그의 아내 베르타 벤츠였습니다. 자칫했으면 역사의 뒤편에 가려졌을지도 모를 페이턴트 모터바겐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도 바로 베르타 벤츠의 도전정신 덕분이었습니다.
“애들이랑 친정 좀 다녀올게.”
벤츠의 자동차 한 대가 그때 600마르크. 지금 돈으로 5,000,000원 정도입니다. 그렇게 비싼 값은 아니었지만 팔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동차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발명의 역사가 그렇지만 비슷한 때에 비슷한 물건을 만드는 경쟁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1888년 8월 5일, 베르타 벤츠는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만하임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포르츠하임의 어머니 집까지 자동차를 몰고 가기로 한 것입니다. 여자 혼자서도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자동차가 얼마나 대단한 발명품인지 사람들도 알게될 것이라는 확신에서였습니다.
이른 새벽, 베르타는 카를이 깊게 잠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두 아들과 함께 친정에 다녀온다는 짧은 메모 한 장을 남겨둔 채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창고에 간 베르타는 카를이 소중히 보관해 둔 ‘말 없이 움직이는 차’를 끌어냈습니다. 남편이 깨지 않도록 집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을 때 베르타와 두 아들은 자동차의 시끄러운 엔진을 켜고 절대 순탄치 않은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 공들여 개발했지만 실용화하지 못하고 남 몰래 보관만 하고 있던 남편을 대신해, 베르타는 남편이 발명한 우수한 작품, 가솔린 자동차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카를의 차가 마차를 대체하는 새로운 운송수단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베르타는 최초의 자동차 장거리 여행이자 주행 테스트를 감행했습니다.
2마력, 최대 시속 16km, 4.5L 기름통, 2단 변속기. 만하임에서 포르츠하임까지, 약 106km(66mi). 13살의 오이겐(Eugen), 15살의 리하르트(Richard) 두 아들과 함께 괴상한 마차를 모는 한 부인을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바라보았습니다. 싸이코 박사만 자동차를 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평범한 여자도 더 쉽게 더 멀리 갈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직접 차를 몰았습니다. 베르타는 훌륭한 마케터이기도 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당시 도로는 지금과 같이 포장된 도로가 아닌 비포창 흙길이었습니다. 딱딱한 나무에 고무를 덧입혀 만든 바퀴는 울퉁불퉁한 길의 충격을 흡수하지 못해 승차감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장시간 운전을 하면 피로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상용화된 자동차 핸들은 둥글지만 당시의 핸들은 막대 모양인 데다가 레버식 브레이크가 탑재되어 있어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여름의 더운 날씨까지, 베르타의 주행을 돕는 것은 없었습니다. 자동차 냉각수가 말라 엔진이 과열되어 연기가 나는 바람에 계속해서 시냇물을 퍼다 부어 냉각수로 써야했고,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를 통과하여 약간 남쪽의 비슬로흐에 도착하자 연료가 떨어졌습니다. 베르타는 가까운 약국으로 달려가 석유 용제의 일종인 리그로인을 구입해 자동차에 주입했습니다. 이 약국은 ‘세계 최초의 주유소’라는 타이틀을 달고 지금도 영업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연료 파이프에 이물질이 가득해 노즐이 막힌 것을 발견하면 머리핀으로 이물질을 빼낸 후 다시 출발했습니다. 체인과 브레이크용 가죽이 끊어질 때에는 스타킹까지 이용하여 응급처치를 했고, 친정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에는 브레이크가 말썽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르타는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구두공을 불러 브레이크에 가줏을 덧대 최초의 브레이크 패드를 만들어내며 카를스루에를 거쳐 슈투트가르트 서쪽의 포르츠하임까지 104km를 달렸습니다.
세계 최초가 달리는 길은 모든 것이 최초였습니다. 최초의 자동차와 최초의 드라이버, 최초의 로드 트립, 최초의 주행 시험, 최초의 브레이크 패드, 최초의 브레이크 라이닝. 자동차의 역사에 온갖 최초를 만들며 베르타 벤츠는 저물녘에 친정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기가 죽어 지내던 남편 카를에게 보란 듯이 전보를 부칩니다.
남편의 자동차를 타고 먼지와 땀범벅이 된 채 친정에 도착한 두 아들과 베르타의 얼굴에는 피곤이 아닌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타고 온 처음 보는 요상한 기구가 마을 사람들의 큰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말이 끌지 않고 스스로 달리는 차가 106km나 되는 거리를 달려왔따는 소식에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친정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베르타의 소식을 들은 카를은 그 누구보다도 감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연약한 여자와 아이들도 장거리 운전을 할 수 있는 자동차라면 분명히 승산이 있을 것이다!”
친정 집에서 사흘을 머문 후 베르타 벤츠는 다시 모터바겐을 끌고, 이번에는 라임 강변을 지나는 90km 길이의 지름길을 택해 만하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길은 2008년 9월 ‘베르타 벤츠 메모리얼 루트(Berth Benz Memorial Route)’라는 이름이 붙었고 세계 자동차 애호가들이 언젠가 한 번은 꼭 달리고 싶은 길로 꼽힙니다. 지금도 격년마다 앤티크 자동차 소유주들이 모여 자동차의 어머니 베르타를 기념하는 퍼레이드를 엽니다.
베르타가 직접 운전하며 얻은 경험담은 훗날 카를의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보완하여 더 편리하고 튼튼한 자동차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중에야 베르타는 기름이 바닥났을 땐 몇 시간이고 두 아들과 함께 자동차를 밀고 가기도 했다며 고비의 순간을 고백했습니다. 어쨌든 카를 벤츠에게 아내의 여정은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었고, 비판적인 비평가와 무심한 언론의 마음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양산 차량
카를 벤츠의 자동차로 장거리 주행을 성공한 베르타의 스토리는 전국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회사가 커지고, 생산 시설도 대규모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회사 운영은 순탄했지만 카를 벤츠는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파트너와 지향점에 대한 이견으로 갈라서게 되어습니다. 이에 카를 벤츠는 다시 한 번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 나서씁니다. 1890년 5월 율리우스 간스(Julius Gans)와 프레드리히 피셔(Friedrich von Fisher)를 새로운 투자자로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파트너가 합류하며 1890년 카를의 라이니쉐 가스 자동차 공장은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엔진 제조 공장으로 성장했습니다. 1893년 카를 벤츠는 액슬 피벗 스티어링을 자동차에 도입하여, 앞바퀴를 다각도로 움직일 수 있는 콘트라(contra) 엔진을 개발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카를은 세계 최초의 양산차인 빅토리아(Victoria)를 출시했습니다. 다음 해인 1894년에는 서스펜션과 헤드램프를 탑재한 자동차인 벨로(Velo)를 개발했습니다. 벨로는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어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는데, 1894년부터 1901년 사이에 약 1,200대가 생산되었습니다. 이 판매량은 벨로를 최초의 양산 차량으로 간주하는 자동차 역사학자들이 있끼도 할만큼, 믿을 수 없이 큰 수치였습니다. 자동차 개발에 대한 카를의 열망은 계속되었습니다. 1896년 카를은 평면 엔진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북서엔진이라고도 불리는 이 엔진은 4개의 실린더가 수평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형태입니다. 이 방식은 요즘의 차들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포르쉐의 박스터가 있습니다. 카를의 벤츠 자동차 회사는 19세기 말 독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선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1899년에는 회사를 공개유한책임회사로 전환하여 벤츠앤씨에(Benz & Cie)로 이어졌습니다. 1890년부터 10년 동안 밴츠엔씨에의 직원은 50명에서 430명으로 늘어났고, 1899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572대에 이르렀습니다. 1903년 1월 24일, 카를 벤츠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감독이사회의 이사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이사직으로 내려왔을 당시 프랑스는 마이바흐(Maybach) 제품들을 가지고 자동차 산업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는 당시 다임러(Daimler)의 개발 이사였는데, 새로 취임한 경영진이 경쟁사였던 메르세데스(Mercedes)와 경쟁을 목표로 만하임 공장에 프랑스 출신의 설계자들을 고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회사를 떠났습니다. 카를 벤츠의 아들 오이겐 벤츠(Eugen Benz)와 리하르트 벤츠(Richard Benz)도 함께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1904년에 승용차 생산 관리자로 다시 복귀했고 그해 연말까지 벤츠 자동차의 판매량은 3,480대에 달했습니다. 비록 카를 벤츠는 회사를 떠났지만 회사는 큰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1906년 카를 벤츠는 그의 아들 오이겐과 함께 카를 벤츠 죄네Karl Benz Söhne) 사를 공동으로 설립했습니다. 그들은 자연 흡기 방식의 가스 엔진을 개발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후, 차량 구조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1925년까지 카를 벤츠 죄네사는 350대의 자동차를 생산했습니다. 1912년 카를은 아들 오이겐과 리하르트가 회사를 경영하도록 하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회사는 이후에도 점점 성장하였고 시장도 넓혀나가 1925년까지 350대의 자동차를 생산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택시 회사들이 카를 벤츠 죄네 자동차를 선택했으며, 여기서 얻은 신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했습니다. 마지막 자동차는 1923년에 생산되었습니다. 비록 1년 뒤에 8/25hp 자동차를 조립하기는 했으나 이 차량은 카를이 자신의 사업과 개인 용도로 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924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자동차 산업도 경기 침체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 많은 기업들이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합병이나 동업의 형태로 변화하는 추세였습니다. 벤츠앤씨에 회사 또한 수 년 동안 경쟁관계였던 다임러 모토렌 게젤샤프트(DMG: Daimler Motoren-Gesellschaft)와 연합을 단행하기로 합의하고 기술, 영업, 마케팅 등의 분야엣 ㅓ협조를 통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양사의 공동 마케팅 활동은 새롭게 설립된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 Automobil GmbH) 회사가 담당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회사는 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26년 벤츠앤씨에와 DMG의 합병이 이루어져 현재 다임러 AG의 모태인 다임러-벤츠 AG가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독일에 자둥차 붐이 일며 열망을 이루게 된 카를은 다임러-벤츠 AG에서 중추 역할을 하다가 합병 3년 후인 1929년 4월 4일 84세의 나이로 독일 라덴부르크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1944년, 베르타 또한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카를 벤츠는 세계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발명가이자 오늘날 최고급 럭셔리 자동차의 대명사인 벤츠를 만드는 메르세데스-벤츠 회사의 공동창업자입니다. 이러한 카를 벤츠가 위대한 발명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에 큰 역할을 한 베르타 벤츠 또한 카를의 최초의 자동차 이후 온갖 최초를 달성했습니다. 결혼 지참금을 투입해 남편의 회사를 일으켜 세우고, 자동차 관련 특허를 공동으로 소유했으며, 직접 장거리 여행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자동차 수리와 정비까지 혼자 힘으로 해낸 베르타 벤츠. 비록 벤츠 부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자동차 산업의 역사에 남긴 업적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이상으로, 153오토테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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