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티슬라비체 나드 니소우(Vratislavice nad Nisou)에 있는 Tanvaldská 38은 142년 전만 해도 마퍼스도르프의 일부였습니다. 뛰어난 판금공이었던 안톤 포르쉐(Anton Porsche)와 그의 아내 안나의 집과 작업장으로도 쓰이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1875년 9월 3일, 그들의 셋째 아들 페르디난트가 태어났습니다.
원래는 큰 형이 아버지의 판금 작업장을 물려받아야 했으나, 그가 1888년 작업 중 사고로 사망하게 되며 페르디난트가 가업의 후임자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페르디난트는 8년간 학교를 다닌 후 1889년부터 아버지 밑에서 판금 작업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14살이었던 페르디난트는 파이프나 나사보다 전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틈틈이 집에서 몇 골목 떨어져있는 기계 방적 공장인 긴츠카이(Ginzkey)에 드나들게 됩니다. 당시에 긴츠카이는 그 지역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전체에서 가장 큰 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공장에서는 약 250개의 기계식 베틀기가 부단히 움직이며 담요나 양탄자를 생산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공장에 있는 최신식 전기 기계 설비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다락방에 올라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전기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배터리 전구가 달린 그의 스케이트입니다. 마을에 있는 꽁꽁 언 호수 위에서 이 스케이트를 신은 그의 모습은 독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혁신적인 욕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전기에 관한 탐구를 금지시켰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의 어머니 안나 포르쉐는 달랐습니다. 안나는 아들이 가진 지식에 대한 목마름을 이해했습니다. 안나는 남편을 설득해 아들이 가까운 곳에 있던 라이헨베르크(Reichenberg, 현재 Liberec)의 국립 기술학교에서 최소헌 저녁 시간에라도 전기 기술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이 기회를 잘 이용했습니다. 1893년 그는 집에 전기 전등과 전기 초인종을 설치했는데, 이는 당시 마퍼스도르프에서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로 인해 그의 아버지도 아들을 매우 자랑스러워 하게 됩니다.
같은 해에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18세의 나이에 마퍼스도르프를 떠나 비엔나로 가게 됩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업은 동생인 오스카가 물려받고, 페르디난트는 비엔나에 있는 전기회사 연합에 기술자로 취직합니다.. 1899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마차 제작 회사인 로너 사로 이직했습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페르디난트는 전기 기술에 대한 그의 지식을 당시 아직 발명 초기 단계였던 자동차에 연결해 새로운 차량을 발명합니다. 이는 바퀴축 모터가 장착된 자동차로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이면서 동시에 세계 최초의 사륜구동 차량이었습니다. 1902년 이 하이브리드 모델은 로너 포르쉐 믹스테(Lohner-Porsche Mixte)를 타고 고향을 방문합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실은 그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그의 신붓감인 알로이시아 요한나 캐스(Aloisia Johanna Kaes)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1906년, 포르쉐는 로너 사를 떠나 비엔나의 오스트로 다임러 사에 수석 설계사로 취임합니다.
1928년 페르디난트는 스투트가르트의 다임러 벤츠를 퇴사하여 1929년 초 오버외스트라이히에 있는 슈타이어 사에 기술 이사로 이직합니다. 이곳에서 그가 설계한 차량 중에는 8기통 모터에 100마력의 슈타이어 오스트리아가 있습니다. 슈타이어 사가 오스트로 다임러 사와 가까운 협력 관계를 맺게 되자 포르쉐는 활동의 자유에 점점 불편함을 느꼈고 결국 1930년 퇴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1934년 슈타이어 다임러 푸흐 사가 탄생합니다.
1931년 4월 25일,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스투트가르트의 크로넨슈트라세 24번지에 ‘Dr. Ing. h.c. F. Porsche 유한 책임 회사, 엔진 및 차량 제작 건설 및 컨설팅’을 설립합니다. 중앙역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서 20명의 직원과 그의 아들 페리 포르쉐가 근무했습니다.
독일 경제가 붕괴 조짐을 보이고 어수선해진 틈에 1933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독일의 수상으로 집권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나치당은 집권 후 중요 지지기반이던 노동자 계층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러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대공황의 여파로 발생한 대규모 실업자를 흡수할 공공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이들이 저렴한 비용에 다양한 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공공 복지 프로그램도 가동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치당의 노동자 기관인 독일노동전선(Deutsche Arbeitsfront, DAF) 산하에 공공 레저기관으로 1933년에 ‘Kraft durch Freude(환희를 통한 활력, KdF)’를 설립합니다. KdF는 저소득 노동자 가정들도 소정의 적립금만 내면 국가의 보조금을 더해 각종 공연 및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가난으로 레저 활동을 꿈꿀 수 없던 노동자 계층에서 이러한 정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34년에 벌써 230만 명이 가입하여 KdF가 제공하는 휴가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 KdF는 이에 각종 리조트를 확보하고 여객선을 건조해서 다양한 레저 패키지를 구성하는 등, 사업을 확장합니다.
당시 자가용은 사치품에 불과했는데, 히틀러는 전 국민이 탈 수 있는 보급용 차량을 선보이기를 원했습니다. 독일 노동자들이 독일에서 만든 저렴한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여 유럽을 자유럽게 오가게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구상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집권과 동시에 공공 토목사업으로 아우토반 건설에 착수했고, 그러던 중 뛰어난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박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여러 차례 시도 끝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를 저녁 만찬에 초청했습니다.
히틀러는 포르쉐 박사와 식사를 하는 도중 종이가 없어 냅킨 한 장을 뽑아 비틀의 시초가 된 딱정벌레 모양의 자동차 시안을 그려서 건네주었습니다. 미술을 전공했던 히틀러는 ‘자연에게서 배워야 한다’며 딱정벌레 모양의 자동차를 제작할 것을 포르쉐 박사에게 요청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의 국민차가 갖출 조건으로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요구를 했습니다. 그 내용은 어른 두 명과 아이 두세 명은 충분히 탈 수 있고, 7L의 연료로 100km를 갈 수 있어야 하며, 값은 1,000마르크 이하여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독일의 수상이었던 아돌프 히틀러가 온 국민이 운송수단을 갖는 것을 바랐
던 이유는 그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독일의 경제 부흥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산업경기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자동차나 도로 같은 국가적 기반시설이 필요했습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그 프로젝트에서 가장 역점을 둔 연료 효율성, 안전성, 간편한 사용 방법,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수리과정과 쉬운 부품 조달방식 등으로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약 3년간의 시도 끝에 1937년 마침내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3,000,000km의 주행 시험 끝에 비틀이라고 알려진 국민차를 개발했습니다. 훗날 비틀은 전 세계에서 누적 2,000만 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여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가 되었습니다.
히틀러와 독일노동자전선은 이를 양산하기로 확정하고 1938년 5월에 니더작센 주의 팔러스레벤에 대규모 부지를 마련하여 공장 착공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기공식에서 히틀러는 이 신차의 이름을 ‘KdF-Wagen’으로 명명하고 이듬해 1939년부터 차량을 양산해 kdF 가입 노동자들에게 공급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동시에 KdF는 독일 노동자들에게 대대적인 판촉 행사를 전개하여 이를 구입할 수 있는 적립 통장을 만들도록 권유했습니다. 이 KdF-Wagen은 차량 가격이 990마르크로 책정되었으며 적립통장 1권은 5마르크짜리 쿠폰 50장을 붙이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노동자는 매달 여력이 되는만큼 쿠폰을 구입해 적립 통장 4권에 쿠폰을 모두 붙여 제출하면 KdF-Wagen을 받는 방식이었습니다.
히틀러와 포르쉐 부자의 꿈은 금방이라도 이루어질 듯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그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노동자들에게 공급된 차량도 고작 210대에 불과했습니다. 노동자들이 그간 적립한 돈 역시 독일의 전쟁비용으로 흡수되었고 개전 이후 폭스바겐 공장은 즉시 군수공장으로 전용되었습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인인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와 아들 페리 포르쉐에게 독일 국적을 강요하고 군용차 개발을 명령했습니다. 독일의 부흥을 선도할 국민차로 개발되었던 KdF는 각종 화기와 캐터필러를 장착한 군용차로 개조되어 폭스바겐 공장에서 쏟아져나오게 되었고, 타입82 퀴벨바겐, 수륙양용 슈빔바겐과 같은 군용차를 생산하게 됩니다. 더욱 많은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포로들을 공장으로 보내 일하게 했으며 영국인을 공포에 질리게 한 복수의 무기 V-1 로켓도 개발했습니다. 전쟁 동안 퀘벨바겐은 약 52,000대, 슈빔바겐은 약 14,000대가 양산되었습니다. 당시 만들어진 퀴벨바겐은 전설적인 군용차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패전한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는 잿더미가 되었고 아돌프 히틀러는 자살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폭파된 폭스바겐 공장은 연합군 산하의 관리에 들어가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당시 포르셰 박사는 포드에 회사를 매각하려 했으나 포드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영국군에게 폭스바겐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는 포르쉐 부자를 프랑스 국민차 개발에 이용하려 했지만 푸조의 창업자 장-피에르 푸조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포르쉐 부자는 히틀러에게 협조했다는 죄명으로 연합군에게 잡혀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영국으로 관할이 넘어간 폭스바겐 공장은 공장 설비의 처분권도 영국이 갖게 되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소련이 그랬듯이 공장 설비를 다 뜯어내어 영국으로 가져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영국 자동차 업체들은 폭스바겐 생산 설비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영국 육군 장교였던 이반 허스트 대령은 전후 폐허 위에서 생계가 막막해진 독일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남아있는 생산 설비에 독일 노동자들을 다시 모아 독일 주둔 영국군에게 납품할 차량 생산을 재개하도록 했습니다. 당초 민수용 차량 설계대로 폭스바겐 1형(Volkswagen Typ 1) 생산이 재개되었습니다. 1945년에는 1,785대가 생산되었고 점차 부품 공급망이 정상화되면서 1946년 3월에는 월간 1,000대 생산이 가능한 수준으로 복구되었습니다. 이들은 1946년까지는 대부분 영국군에게 납품되었으며 독일의 민간 경제가 서서히 복구되면서 일반 독일 시민들에게도 공급되기 시작해 1947년에는 9,000대 이상이 민간 시장에 판매되었습니다.
아들 페리 포르쉐는 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보다 먼저 석방되었고 오스트리아의 산골 마을 그윈트의 작은 오두막집에 포르쉐 설계사무소를 세웠습니다. 그 사이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프랑스의 강요 속에서 르노 4CV 자동차를 설계했습니다.
1945년 8월 1일 아들인 페리 포르쉐는 이탈리아 치시탈리아에 경주차를 설계해주고 받은 돈으로 아버지의 보석금을 마련했고 2년 뒤 스포츠카 356의 설계도 마쳤습니다. 356번의 설계RMxdp 탄생한 이 자동차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포르쉐 스포츠카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페리 포르쉐의 356은 발전을 거듭한 끝에 1951년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에 출전 우성하여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포르쉐 박사가 그만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딸인 루이제 포르쉐와 사위인 안톤 피에히가 폭스바겐 회사를 이끌고, 아들인 페리 포르쉐가 포르쉐 회사를 이끌어 각자의 길을 걸으며 세계 자동차 산업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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