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153오토테크입니다.
오늘은 명실상부 글로벌 리더인
현대자동차그룹과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간 10% 외에 안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
부지런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좋은 때도 놓치지 않고 잘 잡아 쓰며 나쁜 때는 더 더욱 부지런히 노력해 수습하면서 비켜가기 때문에 나쁜 운이 크게 작용을 못한다. 반대로 게으르며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때가 와도 손이 늦어 붙잡지 못해 좋은 때를 나쁜 때로 만들고 나쁜 때는 운 탓만 하며 좌절 속에 허우적거리기 때문에 항상 불운의 연속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 아산(峨山) 정주영
실패는 있어도 시련은 없다, 아산 정주영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청군 답전면 아산리의 빈농 정봉식과 한성실 사이에서 故 정주영 회장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6남 2녀 중 장남으로, 호는 고향 마을 이름을 딴 아산(峨山)이었습니다.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의료원도,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북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 역시도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입니다.
故 정주영 회장은 1921년부터 3년 동안 서당에서 공부하다 1930년에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는데, 이는 故 정주영 회장의 최종 학력이 됩니다. 다만, 당시 초등 의무 교육이 없었던 점, 보통 교육의 개념이 희미한 시절이었던 점, 보통학교 취학률이 20%도 채 안 된다는 점 등으로 故 정주영 회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준 상위 20% 정도의 교육은 받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2020년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고등학교 졸업은 물론이거니와 대학 학력과도 비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故 정주영 회장의 부친인 정봉식은 장남 정주영이 훌륭한 농사꾼이 되어 가족을 잘 부양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故 정주영 회장은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농삿일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데 반해 가난에서는 벗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故 정주영 회장은 농업 대신 다른 직업을 찾고자 수 차례 가출을 감행하게 됩니다.
어디 가서 어떤 노동을 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같은 쥐라 해도 뒷간에 있던 쥐는 똥 먹다 도망 가고, 광에 있던 쥐는 쌀 먹다 도망간다고 했다.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청년 정주영은 175cm의 큰 키에 체력 또한 좋아 힘을 쓰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 습니다. 함경북도 청진으로 가 철도 공사가 한창이던 탄광촌 근처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하고, 일도 구하지 못한 채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주산과 경리 학원에 등록하기도 했으나 수 차례의 가출은 아버지에게 끌려오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소학교 친구 중 부농의 아들이었던 오인보(훗날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창립 멤버)와 네 번째 가출을 하게 되는데, 인천과 서울의 공사장, 공장 등에서 닥치는대로 일한 끝에 1934년, 고향을 벗어나 서울에서 마곡상에 취직해 드디어 정착을 하게 됩니다.
1934년, 신당동의 쌀 가게 '북흥상회'에서 쌀 배달 점원으로 일하던 중 당시 정주영을 눈여겨 본 60대의 쌀 가게 주인 이경성 씨는 근면성실한 정주영에게 침식을 제공했고 장부 정리까지 맡겼습니다. 이후 정주영에게 가게를 넘겨주어 1938년 1월 정주영은 쌀 가게를 인수하고 '경일상회'를 운영하게 됩니다. 22세 청년 정주영은 그동안 쌓은 신용만으로 배달꾼 4년 만에 쌀 가게 주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쌀만을 판매해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좋았지만 1939년 12월 전시 통제 경제로 문을 닫게 됩니다.
1940년 3월 서울 아현동의 '아도서비스자동차 수리공장'을 3,500원에 인수해 5,000원의 합작 회사로 만들게 됩니다. 삼창정미소 주인 오윤근에게서 신용으로 3,000원, 친구 오인보에게서 500원을 차용하고 동업자가 출자한 800원 등으로 충당했습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식산은행(현 산업은행) 행원의 한 달 급여가 70원이었습니다.
정주영은 경성서비스의 정비 기술자 이을학과 김명현을 끌어들여 아도서비스의 영업을 개시하게 됩니다. 아도서비스는 직원이 80여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되었습니다. 이중에는 윤덕영(조선총독부 중추원 제5대 부의장),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차도 있었습니다. 정주영은 빨리, 완벽하게 고치고 수리비는 많이 받는다는 방침으로 사업 성공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1940~1942년 당시 조선에서 자동차는 극소수의 부유층이나 소유하고 탈 수 있는 매우 비싼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간단한 수리임에도 수리 일을 늘려서 공임을 더 받거나 일부러 부실한 수리를 하여 다시 정비소를 찾게하려는 관행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주영은 '자동차가 고장나면 차 주인이 발이 묶여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빨리 차를 고치는 것이 고객을 위한 길이다'라며 수리일은 아무리 큰 고장이라도 무조건 3일 이내, 다시 고장나지 않게 완벽하게 수리한다는 가치를 내걸었습니다. 대신 수리비용은 다른 공장에 비해 3~5배를 더 받았는데, 당시 자동차를 소유했다는 것은 그 시절 상당한 부유층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수리비의 많고 적음보다는 빨리, 정확하게 수리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비싼 가격에도 순조롭게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밤 12시까지 작업소에 머물면서 고객들의 차를 '빨리 빨리' 수리했습니다. 이처럼 '빨리 빨리'와 '빠르고, 정확하고, 납기 준수'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경영은 순조로워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개업 20일 만에 부채의 절반 정도를 상환하기도 했습니다.
아도서비스의 화재와 재기
그러나 초창기의 공장은 25일만에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새벽에 밤새도록 일을 한 한 공원이 기름투성이 손을 씻기 위해 시너로 불을 지펴 물을 데우다가 잘못하여 불이 번지게 된 것입니다. 이 화재로 건물과 수리를 위해 입고된 트럭 4대, 승용차 1대, 외상으로 확보해놓은 부속품도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화재 후 정주영은 윤덕영의 자택인 벽수산장과 조선총독부에 직접 찾아다니며 '차 값을 갚겠으니 시간을 달라'는 말을 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이에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은 자신을 찾아온 정주영에게 화신백화점이 전소되었다 재건했던 이야기와 사업 상의 조언을 해주며 격려했다고 합니다. 또한 박흥식 사장은 화신백화점의 자동차를 모두 정주영의 공장으로 보내 수리하도록 배려했습니다.
정주영은 재기를 위해 오윤근 사장에게서 3,500원을 더 빌렸습니다. 오윤근 사장은 "내 평생 사람 잘못 보아 돈 떼였다는 오점을 안 남기고 싶어 다시 더 빌려주겠네"라며 정주영의 요구에 응해주었다고 합니다. 정주영은 자리를 동쪽으로 옮겨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뒷골목 빈터에 무허가 공장을 차려놓고 직원 50여 명으로 자동차 수리업을 재개했습니다.
하지만 1942년 일제의 기업 통제 정책인 '기업정비령'에 의해 정주영의 아도서비스가 종로 5가에 있던 대형 정비업체 '일진공작회'로 강제 흡수, 합병됩니다. 정주영은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수리업을 그만두었고, 아도서비스를 정리한 잔금으로 트럭을 구입하여 석탄운반업을 했습니다. 당시 아도서비스 직원도 징병되는 등 전쟁이 한창인 시절이었는데 정주영은 나이가 있었기 때문에 징병이 아닌 징용 대상이었고 더군다나 석탄운반업을 하며 군수산업종사자로 분류되어 징용이 면제되었습니다.
광복과 현대의 시작
시련에 굴하지 않은 정주영은 1945년 8.15 해방 이후 1946년, 서울 중고 초동 106의 적산 부지 200평을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합니다. 사명 '현대'에는 '과거의 낡음'과 대치되는 '새로움'의 의미와 함께 시대를 앞서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1년 만에 종업원 수가 7~80명으로 불어나게 됩니다. 정주영은 자동차 수리대금을 받기 위해 미군 부대를 자주 출입하면서 토건업이 유망할 것임을 간파했고, 1947년 5월 25일 현대토건사 간판을 올리게 됩니다. 주변에서 토건업은 위험성이 크다며 말렸지만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안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강행했다고 합니다.
공업학교 교사 출신 기사 1명과 기능공 10여 명으로 건축업을 시작했고, 첫 해 매출액 1,530만원을 기록했습니다. 1950년에는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합병해 공칭자본 3,000만원, 불입자본금 750만원의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6.25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주영은 피란지 부산에서 주한미군 막사 건립을 시작하며 일본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를 졸업하고, 해방 직후부터 주한미군 통역 장교로 활동하던 첫째 동생 정인영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한국 전쟁 발발로 위기를 맞았으나 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미군 관련 건설 공사를 수주하게 되었고 서울 수복 이후에는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여 사업 토대를 다졌습니다. 이후 전후 복구 사업에 참여해 6.25 전쟁으로 파괴된 한강 인도교, 제1한강교,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며 사업 규모를 키워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 중 도급한도액 1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1964년에는 건설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시멘트 공장을 준공,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 고속도로 건설 사업에 참여합니다. 1970년대에는 중동 건설 붐을 타고 사세를 크게 확장했으며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지구 간척 사업 등을 추진하여 국내 대표 건설사로 성장하게 됩니다.
정주영은 아도서비스를 운영할 때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자동차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자 동생 정세영으로 하여금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현대자동차는 현대건설을 모체르 1967년 12월에 자본금 1억 원으로 설립됩니다. 설립 당시 현대자동차는 미국 포드자동차와 합작으로 시작했으며, 1968년 5월 울산의 20만 평 부지에 연간 3,500대를 생산할 수 있는 자동차 공장을 착공하고 회사를 설립한 이듬해인 1968년 11월 1일, 미국 포드사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소형 세단 '코티나'를 처음 선보이게 됩니다. 국산화율은 20% 정도로 낮았고 주요 부품은 포드사에서 들여와 조립했습니다. 코티나는 현대자동차의 1호차라는 타이틀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잦은 고장으로 '고치나', '코피나', '골치나' 같은 불명예스러운 이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는 코티나 생산 이후 트럭이나 버스 등을 생산하다가 1973년 3월, 현대자동차 최고 경영진이 포드와 추진 중이던 합작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경영방침을 발표하게 됩니다. 회사의 중역과 간부들은 자금 부담과 기술 부족 등을 이유로 결사 반대했지만 이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그 해 4월부터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세우기 시작해 이후 영국 퍼킨스(디젤 엔진), 일본 미쓰비시(가솔린 엔진), 이탈리아의 이탈디자인(자동차 설계) 등과 기술 제휴를 맺었습니다. 독자모델 생산공장을 짓기 위해 프랑스 수에즈 은행,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 일본 미쓰비시 상사 등에서 차관을 도입합니다.
그러다 1974년 6월, 마침내 현대자동차의 고유 모델인 '포니'가 시작차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독자 모델을 갖는 순간이었습니다. 포니는 그 해 10월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에도 출품됐는데, 당시 현지 언론인 라 스탐파는 "한국이 자동차공업국의 대열에 끼어들었다는 제하의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포니라는 차명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공모를 통해 지어졌습니다. 수출 지향적인 부분도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1968년 현대자동차의 생산량은 고작 614대에 불과했지만 1974년부터 1억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준공한 연간 56,000대 규모의 울산 공장이 완공된 1975년 이듬 해에는 생산이 1만 대를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6년 1월에 드디어 포니를 판매하게 됩니다.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와 최초의 자체 엔진 알파엔진
현대자동차와 미쓰비시자동차의 역전 드라마는 현대자동차의 압축 성장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쓰비시는 현대자동차에 엔진 기술을 전수한 스승이었지만 지금은 로열티를 내고 현대자동차의 엔진 기술을 가져다 쓰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한영석 한남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현대자동차는 1973년부터 기술 자립 전략을 세워 각고의 노력 끝에 독자적인 제품 기술을 확보했다"며 "이같은 독자 기술을 토대로 현대자동차가 글로벌 메이커로 도약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수많은 개도국들이 자국의 자동차 산업 육성에 나섰지만 끝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도 다름 아닌 독자기술 획독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포니는 1976년 1월 26일부터 판매가 시작되었으며 가격은 2,289,200원 선에서 판매되었습니다. 같은 해 대한민국 승용차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당시 자동차 및 차종이 많지 않던 시대에 10,726대가 판매되며 43.5%의 점유율을 보였습니다. 포니는 차명에 어울리는 조랑말 모양의 엠블럼을 적용했습니다. 단숨에 인기 차량으로 등극한 포니는 에콰도르에 5대가 수출된 것을 시작으로 다른 국가에도 서서히 수출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에콰도르 수출분 중 1대는 20년간 현지에서 택시로 1,500,000km를 주행하고 현대자동차 역사관에 전시되기 위해 1996년 대한민국에 재반입되었습니다.
1977년 당시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미국 대사는 정주영을 만나 "현대가 자동차 독자 개발을 포기하면 포드든 제너럴 모터스든 원하는 조건으로 조립 생산 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해 현대를 지원하겠다. 중동 건설에서도 현대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정주영은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나 다름없고 일생에 번 돈을 다 들여 실패하더라도 후대에 자동차 공업을 성공시킬 디딤돌을 놓는다면 후회는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이같은 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독자 개발을 밀어붙였습니다.
다만 독자 개발은 현대에 있어서도 사운을 건 도박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동생 정인영은 정주영에게 "독자 개발을 하려면 자기 자본의 2~30배나 되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타산이 맞기 위해서는 최소한 50,000대는 팔아야 한다. 그런데 1973년 대한민국 전체 자동차 판매량이 승용차, 버스, 트럭을 다 합쳐야 18,000대를 넘기는데 현대는 그 중 겨우 4,000대를 팔았다. 내수 시장에서도 이정도 밖에 팔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포니는 개발 후 출시 전부터 62개국 228곳의 상사에서 수입을 희망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대박이 나게 되고 정인영의 걱정은 기우로 끝나게 됩니다.
1976년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국산차를 해외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1983년 캐나다에 현지 법인을 세워 해외 판매망 구축을 시작했고 1985년 자동차 시트 제조업체 효문산업을 합병하고 1986년 포니엑셀을 북미 지역으로 수출해서 북미 시장에 진출, 1989년 캐나다 퀘벡 주 브로몽에 현지 공장을 세웠으나 잇따른 부진으로 1993년 공장을 닫습니다. 1995년 전주 공장, 1996년 충남 아산 공장을 각각 세웠으며 같은 해 인도 현지 법인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은 현대자동차의 사활이 걸린 기간이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현대자동차 내부에서 자동차 엔진 자체 개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 엔지니어들의 전문성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정부에서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 압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주영은 여기서 중공업은 나중에 투자하여 키워도 되겠다고 판단했기에 현대자동차를 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체 엔진 개발에 착수하기 위해 해외에서 GM에 근무 중이던 이현순 박사를 불러 엔진 자체 개발 연구에 참여하도록 설득했습니다. 이때 정주영은 이현순 박사에게 자체 엔진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설득했고, 결국 이현순 박사가 제안을 수락하자 정주영은 연구소를 건설해주기 시작했는데 이 연구소가 바로 현대자동차 마북리 연구소입니다. 물론 성공 확률은 낮았고 실패할 것이라는 주변의 무시, 그리고 당시 미쓰비시에서 엔진 설계도를 사와서 제조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쓰비시에서의 압박도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이현순 박사의 끈기있는 노력 덕분에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로 자체 엔진을 개발해냈습니다. 프로젝트 내 이 엔진의 이름은 알파엔진이었습니다. 이후 베타엔진, 감마엔진을 설계,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감마엔진은 당시 현대자동차의 경영진이 미쓰비시의 시리우스2 엔진과 관련하여 계약을 맺는 바람에 설계만 하고 프로젝트가 중단됩니다. 이후 이현순 박사는 감마엔진에서 성능을 더욱 향상시킨 세타엔진을 개발해냈고, 이 세타엔진은 바로 기아 로체와 NF소나타에 장착하게 됩니다. 이후 2008년까지 타우엔진을 개발합니다.
제2의 고유모델 스텔라와 수출
울산의 종합자동차공장이 가동되면서 1977년 4월에는 1트럭 및 3트럭과 현대버스를 생산, 시판하였고 1978년 11월에는 그라나다 승용차와 리어엔진버스를 선보이는 등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했습니다. 1983년 6월 포니에 이은 제2의 고유모델은 스텔라자동차를 생산, 시판했습니다. 포니 생산 50만 대를 넘어선 1984년에는 국내 최초로 캐나다에 포니승용차를 수출하면서 캐나다 현지법인(HMC)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985년 5월에는 캐나다에 현지 부품공장을 기공하여 해외 현지에서의 수출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나갔습니다.
1986년 1월에는 전차종 생산량이 100만 대를 넘어섰으며, 대형 고급 승용차 '그랜저'를 개발하여 생산, 시판에 돌입했습니다. 캐나다에 이어 1985년 현지법인 HMA를 설립한 미국에서는 1986년 소형 승용차 '엑셀'을 처음으로 수출하여 미국 자동차 시장에 신고했습니다. 그 후 엑셀승용차는 미국에서 인기리에 판매되어 1988년에는 소형 수입차 중에서 3년 연속 베스트셀러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처럼 엑셀승용차 수출이 호조를 보이면서 1989년에는 단일 차종으로 수출 누계 100만 대를 돌파했습니다.
한편 현대자동차는 지속적으로 각종 신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1987년 1월에는 미니버스 '그레이스', 1톤 트럭 '포터', 2.5톤 트럭 '마이티'를 생산, 시판했습니다. 그리고 7월에는 '그랜저 2.0'보다 업그레이드 된 '그랜저 2.4'를 개발하여 고급 승용차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이와 함께 1988년에는 고급 중형차 '쏘나타'를 생산함으로써, 국내의 대, 중, 소 승용차 시장에 골고루 자동차 브랜드를 선보였습니다. 1988년 6월에는 미국 동부 부품센터를 착공했으며 1989년 7월 캐나다 브로몽 현지 공장을 준공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미국 LA에 자체 할부금융회사(HMFC)를 설립하여 자동차 수출 기반을 더욱 확고하게 다져나갔습니다.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도 신차 개발은 계속 이어져서 1990년에 준중형차 '엘란트라'와 국내 최초 스포츠카 '스쿠프'를 개발, 생산하여 시판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해 9월에는 자동차 정비 직업훈련소를 개소했으며 10월에는 제3공장을 준공했습니다. 1991년 1월 독자 엔진 및 트랜스미션을 개발했고 4월에는 알파엔진 공장을 준공했으며 11월에는 전기자동차를 개볼(1호 시험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 초저연비(LEAN BURN)엔진 자동차를 개발했습니다. 1992년 12월는 '엘란트라'가 캐나다에서 '올해의 자동차'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연간 125,000만대의 생산 능력을 갖춘 전주 공장을 완공했습니다. 이 설비는 25인승 이상의 중대형 버스와 2.5톤 이상급 트럭, 각종 특장차를 생산하는 시스템을 갖춘 공장입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신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1994년 '엑센트', 1995년 '아반떼', 1996년 '쏘나타3', '다이너스티', 스포츠카 '티뷰론'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차종을 국내외 시장에 선보이면서 1996년 전 차종 생산 누계가 10,000,000만 대를 돌파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신차 개발 뿐만 아니라 자동차 기술에 대한 R&B에도 집중 투자를 하여 1995년 1월 무단 변속 자동차, 3월 중형 베타엔진을 독자적으로 개발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는 첨단 반자동 변속자동차를, 6월에는 첨단 물류시스템 '엘리스'를 개발했습니다. 역시 같은 해 6월에는 파키스탄 승용차 합작 공장, 7월 인도네시아 시케이디(CKD) 공장을 가동했습니다. 1996년 10월 남양 자동차종합기술연구소를, 11월에는 연산 300,000대를 생산하는 아산 공장을 준공했습니다.
1997년에는 연산 60,000대 생산 능력을 갖춘 터키 공장을 준공했으며 신차 '아토스'를 생산했습니다. 또한 1997년에는 'EF쏘나타'와 '그랜저XG'를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한편 1998년 12월에는 기아자동차의 주식 51% 인수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현대자동차는 국내 자동차 생산의 7~80%를 장악하면서 자동차업계의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현지 기업과의 합작이 아닌 현대자동차 단독 투자로, 인도 첸나이에 연산 150,000만대의 생산 능력을 갖춘 인도 공장을 준공했습니다. 1999년에는 '트라제XG', '베르나', '에쿠스'를 시판하고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SUV 싼타페'를 선보였습니다. 이 해에 국내 최초로 자동차용 연료 전지를 개발했습니다.
IMF와 한국 자동차산업 신메카 출범
현대자동차의 40년 역사는 1997년 IMF 사태 이전과 이후 시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현대자동차 출범 후 IMF까지 30년은 현대자동차가 현대그룹 울타리 내에서 자립 기반을 마련한 기간이었다면, 이후 10년은 구 현대그룹의 해체로 현대자동차가 자동차그룹으로 홀로서며 글로벌 메이커로 도약하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IMF 이후 정몽구 회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현대자동차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이전 30년 간의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최근 10년 간의 압축 성장은 이전 30년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이항구 팀장은 "현대자동차가 IMF 위기에서 조기에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IMF 이후 10년 간 현대자동차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글로발리제이션(Globalization)'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 공장을 증설하고 중국에 생산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신흥개도국의 수요를 선점할 수 있었고 현대자동차는 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높은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내수 시장은 IMF 직후인 1998년을 바닥으로 1999년부터 급격히 회복됐고 국가 부도 사태로 환율을 상승해 오히려 한국 공장의 수출 환경은 좋았습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재무적 리스크'를 증가시키는 '글로벌 확장 전략'에 반대가 많았지만 정몽구 회장은 과감하게 해외 진출 전략을 밀어부쳤습니다.
몇 년 뒤, 내수 시장은 포화 상태에 이르러 정체되고, 설상가상으로 수입차의 거센 공세까지 받게 됐으며 수출 환경도 '원고'엔저'로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결과적이지만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전략이 무산되어 국내 공장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추지 못했다면, 지금쯤 현대자동차는 '생존'의 기로에 내몰렸을지도 모릅니다.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확장 전략은 이 때문에 선견지명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 현대자동차는 1998년 기아자동차를 인수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누리게 됐습니다. 원재료 구매에서 연구 개발(R&D)에서의 비용 절감을 실현하고 기아자동차와 더불어 내수 시장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수익성 증대로 이어졌고 현대자동차는 탄탄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글로벌 확장 전략에 더욱 힘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2000년 3월에는 이른바 '왕자의 난'이라는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정주영 명예장의 차남인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등 자동차 전문 그룹을 비롯한 10개의 계열사를 가지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 독립했습니다. 2020년 10월 정의선 회장이 취임하여 3세 경영 체제를 본격화했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독립한 이후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경영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2002년 중국에 베이징현대공장을, 2005년 미국에 앨라배마공장을 준공했습니다. 이처럼 해외 공장의 설비를 확충하면서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자동차시장에서의 위상도 높아져 2005년에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 진입했고 2006년에는 현대자동차그룹이 자동차 총생산량 부문 세계 6위에 올랐으며 매출 100조 원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한 유럽시장으로 눈을 돌려 2009년 체코 공장을, 2010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러시아 공장을 완공했습니다. 남미 지역으로도 시장을 확장하여 2012년에 브라질 공장을 준공했으며 2013년에는 해위 누적 판매 50,000,000대를 달성했습니다. 이로써 현대자동차는 세계 판매량 순위 5대 자동차 회사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현대, 명실상부 글로벌 리더
현대자동차는 현재 울산, 전주, 아산 등 국내에 3개의 생산 공장을, 해외에는 미국, 중국, 인도, 터키 등 4곳의 생산 거점을 거느리고 있으며 2009년과 2010년엔 각각 체코 공장과 러시아 공장이 준공되었습니다. 특히 2010년엔 기아자동차와 더불어 국내외에서 6,500,000대를 생산할 계획이며 목표 달성 시 현대자동차그룹은 글로벌 톱4 혹은 톱5의 명실상부한 글로벌 리더로 자리를 매김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세계 자동차시장의 메카인 미국 시장에선 7년 째 점유율이 2%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인도와 중국 등 신흥 시장에서조차 경쟁이 매우 심화되고 있습니다.
서성문 한국증권 연구위원은 "지난 10년 간 현대자동차의 품질이 크게 개선 됐지만 선진시장에서 정체된 판매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내구적인 품질을 더욱 높이고 브랜드 가치를 제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아울로 올해 힘겹게 도출한 '노사 무분규'의 전통을 수립하고 기아자동차를 완전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현대자동차는 장기적으로도 새로운 전환기에 놓여있습니다. 지난 100년 이상 세계 자동차 시장의 주류였던 내연기관 자동차가 환경 규제와 에너지 안보 위협, 화석 연료 고갈 등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하이브리드카나 연료전지차 등 '전기'로 자동차가 움직이는 '친환경 미래차'로 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00년 간의 자동차 역사는 유럽과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이끌어왔지만, 전환점에 놓여있는 지금은 이미 도요타를 위시한 일본 자동차산업이 미래차 분야를 사실상 독주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로서는 일본 자동차에 밀려 성장에 다소 차질을 빚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래차 분야에서 일본에 밀리기는 미국이나 유럽 업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자동차가 패러다임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면 퇴보가 불가피하겠지만 반대로 전환기에 잘 적응한다면 오히려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는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순위를 더욱 끌어올리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쉼없이 달려온 현대자동차의 변신이 주목되는 시점입니다.
2024년 현재, 현대자동차그룹은 미국 시장조사기업 제이디파워(J.D.Power)가 발표한 2024년 신차품질조사(IQS, Initial Quality Study)'에서 종합 결과 164점을 기록하며 글로벌 15개 자동차그룹사 중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올해로 38회 째를 맞는 제이디파워 신차품질조사는 1987년부터 시작된 세계 최고 권위의 품질 조사입니다. 고객이 차량 구입 후 3개월 동안 경험한 품질 불만 사례를 집계해 100대 당 불만 건수를 점수로 나타내며, 점수가 낮을 수록 품질만족도가 높음을 의미합니다.
올해 조사는 일반 브랜드 17개, 고급 브랜드 14개 등 총 31개 브랜드 가운데 지난 해 4월부터 올해 2월까지 미국에서 신차를 구매한 약 10만 명의 고객들에게 227개 항목의 설문을 진행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글로벌 15개 자동차그룹 중 가장 낮은 평균 점수인 164점을 기록, 닛산(168점)과 제너럴모터스(172점)을 제치고 당당히 1위에 올랐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 출시한 신차에 혁신적인 편의 기능과 차별화된 디자인을 선제적으로 도입하는 동시에 고객 만족을 위한 지속적인 품질 개선 활동을 통해 인포테인먼트, 주행보조 및 안전 기능 등에서 고객들로부터 우수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62점을 기록하며 램(149점), 쉐보레(160점)에 이어 일반 브랜드 및 전체 브랜드 기준 3위를 차지했으며 기아는 163점으로 현대자동차에 이어 일반 및 전체 브랜드 4위를 차지해 뛰어난 품질 기술력을 증명했습니다. 제네시스는 184점으로 고급 브랜드 평균인 232점 대비 48점이라는 큰 점수차로 고급 브랜드 중 3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와 함께 차급별 평가에서도 기아 K3가 2019년 이후 6년 연속 준중형세단 1위, 카니발이 2년 연속 미니밴 1위, 제네시스 G80이 4년 연속 준대형 프리미엄 세단 1위, 현대자동차 싼타크루즈가 중형 픽업트럭에서 1위에 올라 총 4개 차종이 최우수 품질상을 수상했습니다.
제이디파워 조사결과는 미국 소비자들의 자동차 구매 기준으로 적극 이용될 뿐만 아니라 업체별 품질 경쟁력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故 정주영 회장과 현대자동차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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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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